책소개
사는 원래 성당(盛唐) 시기부터 널리 유행한 민간 가요였는데 송대(宋代)에는 사대부 문학의 하나로서 크게 유행했다. 고려에는 음악과 함께 전파되었다. 고려 예종(睿宗) 9년(1114)에 송 휘종(徽宗)이 사신을 통해 속악(俗樂)인 신악기와 악보 등을 전해 주었고, 11년(1116)에 다시 아악(雅樂)인 대성악(大晟樂)을 전해 주었다. 이렇게 전해진 당악(唐樂) 중에는 안수, 구양수, 유영, 소식 같은 북송 사인(詞人)의 사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려에 사가 전파된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 사의 창작은 이러한 당악의 전파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3대 선종(宣宗)이 <하성조(賀聖朝)>를 지었다고 하고 16대 예종이 여러 차례 사를 지어 신하들에게 선사했다 한다. 다만 이는 기록에 불과할 뿐 사 작품은 전하지 않아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최초의 고려 사는 이규보(李奎報)의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수가 11수에 불과해 고려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작품 수와 질적인 면에서 고려사를 대표하는 이로는 단연코 이제현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제현 사는 ≪익재집(益齋集)·익재난고(益齋亂藁)≫에 따르면 작품 수가 54수로(1수는 사패명만 전한다) 현전하는 고려 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활용한 사조 또한 15조로 다양한 편이다. 평가도 매우 높다. 사 비평으로 유명한 청대 학자 황주이(況周頤, 1849∼1904)는 ≪혜풍사화(蕙風詞話)≫에서 “이제현 사의 …이러한 구는 북송과 남송 명가의 사 중에 두어도 거의 손색이 없다(益齋詞, …此等句, 置之兩宋名家詞中, 亦庶幾無愧色)”라고 평했다.
이제현이 사의 창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경으로는 연경에서의 만권당(萬卷堂) 활동을 들 수 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이듬해인 1314년 원나라의 수도 연경의 사저(私邸)에 만권당을 세우고 당시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했다. 이 가운데 조맹부, 장양호, 우집이 이제현과의 교유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원나라 문인은 시뿐만 아니라 사의 창작에도 능했는데, 특히 사적인 교유에서는 사를 많이 창작했다.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이제현은 사 창작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또 사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이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이해도도 커졌을 것이다.
그는 여행 사를 많이 남겼다. 사를 통해 여행의 서막을 여는 것은 사의 기능과 역할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의 내용에서 사에 대한 창작 의지를 다짐하는 것도 독특한 면모다. 여행 중에 경험하는 좋은 경치를 ‘청아한 노래’ 속에 모두 들인다는 것은 여행과 사의 창작을 상호 연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는 송대 이후 여행과 사의 창작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송대 여행 사는 부임지로 떠나며 나누는 송별의 정, 벼슬살이의 고단함, 귀양 가는 슬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 나그네의 외로움 등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사의 창작을 선언하며 떠나는 여행도 거의 없었고 사의 창작 의지를 다짐하는 내용의 사도 거의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제현 사의 가치와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200자평
고려 사(詞)를 대표하는 이제현의 작품 54수를 모두 수록했다. 그의 사는 송사(宋詞)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송도팔경(松都八景)을 노래한 연작 사는 사물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청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해 평면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 낸다.
지은이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櫟翁)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옮긴이
김수희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남당사의 아속공존 양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역서로는 ≪풍연사 사선≫(지만지, 2012), ≪명대 여성 작가 총서 1−이인 시선≫(공역, 도서출판 사람들, 2011), ≪명대 여성 작가 총서 13−심의수 사선≫(도서출판 사람들, 2014), ≪명대 여성 작가 총서 7−산곡≫(공역, 도서출판 사람들, 2014) 등이 있다. 여행, 공간, 여성 등의 키워드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김지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장염사학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송사 삼백수≫(을유, 2013), ≪협주명현십초시≫(공역, 학고방, 2014)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며 중국 고전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김하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주이준 ≪정지거금취≫의 애정표현 방식>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협주명현십초시≫(공역, 학고방, 2014)가 있다. 현재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청대 주이준의 사에 관해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청대 사를 소개하고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다.
임도현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신소재 개발 연구를 수행하다가 중문학에 뜻을 두고 다시 영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남대에서 <이백 시에 나타난 술의 이미지>로 석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이백의 자아추구 양상과 문학적 반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역서로는 ≪쫓겨난 신선 이백의 눈물≫(서울대출판부, 2015), ≪이태백 시집≫(공역, 총8권, 학고방, 2015), ≪이백 시선≫(지만지, 2013), ≪협주명현십초시≫(공역, 학고방, 2014) 등이 있다. 현재 중국 고전 시가를 대중적으로 알리려는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
차례
심원춘−장차 성도로 가면서
강신자−칠석에 비를 맞으며 구점에 이르러
자고천−신락현을 지나면서
자고천−9월 8일에 송도의 친구들에게 부치다
자고천−보리술을 마셨다
자고천−양주의 평산당
자고천−학림사
태상인−저녁에 가다
완계사−일찍 길을 나서다
완계사−황제의 주정원에서
대강동거−화음을 지나다
접련화−한 무제 무릉
인월원−마외에서 오언고의 사를 본뜨다
수조가두−대산관을 지나며
수조가두−화산을 바라보며
옥루지−촉 땅에서 중추절에 비를 만나다
보살만−배에서 밤에 묵다
보살만−배를 청신에 대다
동선가−두보초당
만강홍−상여 사마교
목란화만−장안 회고
목란화만−이 장군 댁의 벽에 쓰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평사낙안 : 옥문관에는 주살이 많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원포귀범 : 남쪽 포구에는 차가워진 조수 급하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소상야우 : 조수 빠진 갈대 포구
무산일단운−소상팔경 동정추월 : 만리에 하늘은 물에 떠 있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강천모설 : 바람 급해지고 구름 모습 어둡더니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연사모종 : 초 땅 교외에 가을장마 그친 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산시청람 : 먼 산봉우리는 소라 천 개요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어촌낙조 : 먼 산봉우리에 저무는 해 머물러 있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평사낙안 : 취중에 한 붓질처럼 성글다가 또 빽빽해지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원포귀범 : 닻줄 풀어 회하 유역을 떠나서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소상야우 : 푸른 단풍나무는 어슴푸레하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동정추월 : 너른 형악이 북쪽으로 임해 섰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강천모설 : 초저녁 무렵 나그네 배를 돌려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산시청람 : 물기운이 가을 더위에 피어오르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어촌낙조 : 비가 갠 긴 강물 짙푸르고
무산일단운−소상팔경 연사모종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자동심승 : 바위 곁으로 맑고 얕은 물을 지나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청교송객 : 향긋한 풀 자란 성 동쪽 길과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북산연우 : 수만 골짜기마다 안개 빛 움직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서강풍설 : 바다 건너오느라 바람 차고 빠른데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백악청운 : 봄바람 분 뒤 창포와 살구꽃이 나오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황교만조 : 보였다 사라졌다 개울물 휘돌아 흐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장단석벽 : 물에 꽂힌 바위 우뚝하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박연폭포 : 햇빛이 빼어난 여러 봉우리를 비추니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자동심승 : 나이 드니 몸이 아직 건강한 것을 기뻐하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청교송객 : 들의 절에는 송홧가루 떨어지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서강풍설 : 눈은 강가의 지붕을 누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북산연우 : 아득히 푸른 하늘 멀리 펼쳐져 있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백악청운 : 새벽에 청교역을 지나
무산일단운−송도팔경 황교만조 : 고전 길은 멀리까지 보이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박연폭포 : 절벽에 휑한 굴이 뚫렸고
무산일단운−송도팔경 장단석벽 : 강마른 뼈대는 천 년을 서 있었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무산일단운
소상팔경 강천모설
바람 급해지고 구름 모습 어둡더니
날씨 차가워지며 눈발이 매섭구나.
보슬보슬 차가움을 체로 쳐 흰 빛을 흩뿌려서
만 채의 지붕에 모두 소금이 쌓이게 하네.
먼 포구에 고깃배 돌아오고
외로운 마을에 술집 깃발 내려졌네.
한밤중 눈 그친 풍경이 은빛 두꺼비를 질투하기에
다시 성긴 발을 묶어 걸어 놓네.
巫山一段雲
瀟湘八景 江天暮雪
風緊雲容慘,
天寒雪勢嚴.
篩寒洒白弄纖纖.
萬屋盡堆鹽.
遠浦回漁棹,
孤村落酒帘.
三更霽色妬銀蟾.
更約掛疏簾.